*아래글은 2020년 4월에 썼던 글입니다.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가 다르다
- 마이클샌델, 기독교 및 불교에서 말하는 정의에 대한 의미
1.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정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강의와 책자의 등장이후 우리사회는 정의라는 신드롬에 쌓여있다. 정의롭자는데 누가 반대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에 정의의 흐름은 벤담의 공리주의에 기초를 두고 다수가 옳다는 대중적 정의에 기반하여 발전하여 왔다.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에서 지배자가 된 것에는 지능폭발도 있지만 군집과 집단을 이루어 만들어낸 집단지성이 핵심중의 하나이기에(그래서 지능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우월한 네안데르탈인을 넘어섰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얼핏보면 진화론적 견지에서도 맞아보인다. 바야흐로 정의는 신에서 제사장으로 제사장에서 왕으로 왕에서 소수의 귀족으로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민주주의에 기반한 대중의 시각으로 이동해왔다. 그러다 보니 소수에 대한 의견 및 자유가 제한되는 한계도 보이고 있다. 다수가 항상 옳다고 할수도 없고 역사상 깨어있는 소수가 결국 다수가 인정하는 정의를 이끌어낸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어쨌는 마이클샌델의 인터넷 강의 및 책을 읽어보면 어떤 것이 정의(正義)라고 얘기하기에 모호한 상황도 많고,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도 제시한다. 그래서 이책에서는 정의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지 정확히 정의가 뭐라고 얘기하고 있지는 않다.
2. 기독교에서의 정의
기독교(카롤릭 + 개신교)는 빛과 어둠, 하늘과 지상, 신과 인간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이 천국과지옥, 신과 악마로 파생되며 정의와 불의로 나누는 개념이 자리를 잡게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이렇게 누가 옭고 누가 그르다는 이원론적인 관념이 강하지 않았다. 이원론적 세계관은 오히려 기원전 8세기 전후로 태동하며 활성화된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니체가 말하는 짜라투스트라)에서 개념이 정립되었다. 지저스 이후 기독교를 대중화하기 위해 문자화하고 이론으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를 이런식으로 해석하고 정리한 듯 하다.
기독교도 지저스의 이후에는 유대인 중심의 인종적인 정의론에서 좀더 대중과 약자를 향한 보편적인 정의론으로 변하게 되었다. 팀 켈러는 마이클샌델의 책과 같은 이름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좀더 상세히 기독교적 관점의 정의에 대하서 다루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현대까지도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양에서의 정의에 대한 관점은 어느 관점이 옳다라는 이원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양자역학이 오랜기간 인정되지 못한 이유의 하나라고도 한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과 달리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연계된 하나의 운동으로 본다는 것에서 일원론에 가깝다.
3. 불교에서의 정의
불교사상의 핵심교리는 사성제(고, 집, 멸, 도)와 팔정도(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근, 정념, 정정)이다.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은 바르다이다. 정견은 바르게 본다라는 뜻이다. 그러면 바르다는 것은 무슨의미인가 기독교에서 처럼 신의 시각처럼 부다의 시각으로 보는게 바르다는 아니다. 불교에서 바르다의 의미는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올바른길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를 정의라고 얘기하고 있다. 즉 바르게 본다는 것은 순간적인 감정이나 고정관념에 의한 치우침이 없이 본다는 의미다. 그런면에서 불교에서의 정의는 균형감 정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4. 내가 생각하는 정의
우리나라도 근대이후 서양사상에 기반하여 교육받고 사회체계가 만들어져왔다. 과거에는 국민끼리의 분열은 적었고 오히려 독재정부나 부정축재 등에 대한 반대하는 전반적인 국민들의 공감대가 있었는데, 최근 몇년간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국민들간에 진영 대립이 활활타고 있다. 사람들의 시각도 자기의 가치관 혹은 이해관계에 맞는쪽에 치우쳐서 보게 되는게 작금의 상황이다. 자기 진영의 얘기는 대부분 옳게 보이고 상대방의 얘기는 옳지않게 보는 경향이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한쪽의 전반적인 가치나 추구방향이 나하고 더 맞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그게 정의롭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현대물리학은 양자역학으로 인해 일원론이 부각되고 있으며 정의도 어느편이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치우침이 없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 궤변론일까? 사실 나도 그렇게 판단한다고 자신할 수 없다. 그래서 시각을 계속 보정하며 치우침이 없이 판단하려고 노력중이다. 나는 진짜 뭐가 정의인지 가끔은 잘 모르겠다. 나는 오히려 합리적이거나 신뢰감이 높은 상황이나 사람을 더 정의롭다고 판단한다. 그러다 보니 사실 특정사람이나 특정 정당에 대한 판단이 바뀌는 경우도 발생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뭔가 특정한 주관이 없거나 기회주의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어쩌다 보니 오늘이 만우절이다.
- 2020.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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