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마의 단상(stray thought)/습작단편 11

[습작] 이방인

알제리에서 태어난 카뮈는 프랑스인 이지만 알제리에서는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이방인이었다. 성장후 다시 프랑스로 왔지만 이번에는 알제리에서 온 이방인이었다. 사르코지 대통령시절 카뮈의 묘지를 파리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유족들은 그냥 카뮈의 정신적 고향인 루르마랭의 작은 공동묘지에 머물기로 하였다. 사후까지는 이방인이 되지않게 하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유추해본다. 그럼에도 루르마랭의 묘지에서 만난 카뮈의 묘지는 여전히 이방인의 묘지같은 느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사랑받은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원주민이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사랑받은 피카소는 프랑스에서도 원주민이었다. 춘천에서 태어났지만 강릉 본가로 온 나는 이방인이었다. 강릉에서 서울로 온 나는 또 이방인이었다. 퇴직 후 고향으로 귀..

[습작] 언젠가는

매일 할 일이 있었음을 매일 갈 곳이 있었음을 같이 식사할 가족이 있었음을 만나고 소통할 친구가 있었음을 음식을 잘 씹을 수 있는 튼튼한 이가 있었음을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괜찮았음을 두 눈의 시력이 온전함을 글을 읽을 수 있는 온전한 정신이 있었음을 소중하고 행복했음을 느끼게 될 것이며... 주변을 살펴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음을 어려운 친구를 돕지 못했음을 하고 싶었던 일을 못했음을 건강을 돌보지 않았음을 그리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보지 못했음을 아쉽고 후회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종마 -

[습작] 전단지

퇴근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20대 여성이 지하철 매장 앞에서 전단지 한 뭉치를 들고 서있다. 얼굴에는 지쳤거나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하루 종일 거부를 많이 당했는지 이제는 사람들에게 잘 다가 가지도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경우 일단 소비자가 관심을 보이면 좀더 구체적인 영업으로 이어진다 점심시간때 식당 근처의 이미 힘들어보이는 노인들이(주로 여성들) 음식점 전단지를 정신없이 나누어 주신다. 때로는 막무가내로 손에 쥐어주기도 한다. 가끔 안받고 지나가면 꼭 동료중 한 사람은 나도 전에 전단지 아르바이트 했었는데 진짜 힘들고 장당 10~20원 겨우 받는데 좀 받아주라고 얘기한다. 조금만 지나면 길거리나 쓰레기통에 수북이 그 전단지가 버려져 있다. 다양한 매장이 많은 강남역 거리를 걷거나 유명 프랜차..

[습작] 스물네시간(부제: 아버지와의 대화)

그리운 그대 어디갔나요 그대가 제결을 떠난지도 거의 20여년이 흘렀습니다 제 아이가 제가 대학을 위해 그대를 떠난 나이가 되니 그대와 대화가 하고 싶습니다 그대와의 대화는 이제는 꿈속에서나 가능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대가 떠나고 한편은 원망도 많았습니다 그대가 몹시 그립습니다. 아직도 기억납니다 제가 직장에 갓 들어간 서른이 되던 어느날 그대가 나의 자취방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날 긴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날 우리의 대화시간은 평생우리가 나눈 대화시간 보다 길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태어나 그대와 같이한 30년 동안 우리는 나눈 대화가 별로 없었습니다 대화도 없이 30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돌이켜보니 어릴적엔 그대가 나에게 많은 얘기를 해주신 것 같기도 ..

[습작] 열정

오랜만에 무언가에 대한 열정이 생겼다 얼핏아는 사람들은 그 열정이 좋다고 한다 숙고하는 사람들은 그 열정을 말린다 현실적으로 그 열정은 훅 불면 날라갈 것 같다 그래도 그 열정을 어쩔 수가 없다 그동안 살면서 생존과 현실을 핑계로 날려버린 열정이 너무 많다 열정을 계속하려면 현실에서 잃을 것이 적지않다 열정은 식었다가도 때만되면 다시 솟아난다 어떻게든 열정을 불태워야한다 - 종마 -

[습작] 꿈

A는 택배원이다. 복잡한 집안일로 십여년 동안 매일 밤 잠을 못자고 때로는 나쁜 꿈에 시달리다 겨우 지난 2~3년전부터 괜찮아 졌는데 최근에 다시 그런 악몽이 재발하고 있다. 자면서도 머리가 복잡해 수면의 질도 나빠서 여러가지 건강지수들이 나빠지고 있다. 그로인해 코골이와 수면무호흡도 생겼고 나쁜 취침 자세로 피가 안통해 가위도 눌리고는 한다. 운전중에도 졸음이 미칠듯이 몰려온다. 이러다가는 택배차 운전을하다 사고가 날것 같다.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B는 수학교사이다. 중고교 시절에는 수학을 지독히도 못했다. 그러던 고등학교 어느날 꿈에서 고민하던 기초수준의 미적분을 풀게되었다 그 이후로 수학 성적이 꾸준히 오르고 대학도 수학교육과를 가서 드디어 수학교사까지 되었다. 요즘 다시 꿈에서 인공지능 알..

[습작] 일장견몽(김일병과 JJ마호니스)

1980년대 말 당시 김일병은 22세의 나이었고 춘천의 한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김일병은 지방(대구) 출신에다 숫기도 없어서 입대 전 대학때도 디스코텍도 거의 안가본 쑥맥이었다. 하루는 같은 부대에서 민간인 군무원으로 일하던 30대 아저씨가 부르더니 김일병 너는 서울에서 명문대 경영학과를 다녔으니 JJ마호니스 가봤지 하면서 자기가 지난주에 가서 토요일 밤에 놀았던 경험담을 얘기했다. 그야 말로 20대 초반의 군인에게는 거의 마약같은 자극이었다. 김일병은 쑥맥이긴 했으나 명문대생 답게 똑똑했고 영어도 수준급이었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기에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상당이 있어보였다. JJ마호니스라고는 들어보지도 못한 김일병은 자기는 고시 준비에 전념하느라 공부만 했다는 핑계를 대었다. 당시 그 ..

[습작] 세 친구와 흰색 옷의 여인?(Woman in white)

세 친구는 대학동기이다. 요즘은 서로 바쁜나머지 1년에 한두 번 만나는데 각자의 생활 환경이 다르다 보니 만나면 할 얘기가 많다. 그 중 한 친구는 오디오와 자전거 조립에 푹 빠졌다고 했다. 이제는 자기가 직접 세팅한 자전거들을 원가보다 꽤 높은 가격에 받고 판다고도 한다. 취미생활도 하면서 돈도 벌다니 부럽기만 하다. 한 친구는 프리랜서를 한지 오래되었는데 뭔가 일상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예전에는 가장 부유한 귀공자 같았는데 세상이 변하다보니 친구의 이미지도 다소 변했나 보다. 나머지 한 명은 원래 늘 평범하다. 뭔가 오늘따라 더 평범하고 밋밋해 보인다. 그래도 세 친구는 30년이란 시간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술잔을 기울이다 거의 20년전 선배 어머니의 장례식장을 가던 길에서 지나치듯이 본듯한 흰색 ..

[습작] 화무십일홍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그녀를 보았다. 긴 생머리와 하얀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 선해보이는 미소... 거의 10년만에 다시 설레임이란 감정이 솟아올랐다. 벌써 기주가 회사를 다닌지도 10년차인데 그녀가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도 아닌데 왜 이제서야 눈에 띄었을지 모를일이다. 혹시 경력사원으로 새로 입사했을까? 뛰는 심장 못지않게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느 부서일까? 결혼은 했을까? 나이는 몇 살일까? 사내 동아리는 무엇일까? 그날 부터 그녀는 기주의 눈앞에 수시로 등장했다. 구내식당에서, 업무회의에서, 회식자리에서 다른 부서와 조인트가 되면서 한두 마디 어깨너머 목소리를 들을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개인적인 대화의 기회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날 기주는 친한 입사동기가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습작] 새벽 고독

우각은 새벽에 눈이 떠졌다. 어릴적 고향친구와 대학교때 여자선배가 꿈에 나왔다. 전혀 인연이 없을것 같았던 그들은 꿈속에서 같이 지내고 있었다. 대학 동아리에서 만났던 여자선배는 평생 마음 속의 누군가였다. 말도 안된다고 선배의 손을 잡고 나오는 순간 잠이 깨었다. 깨고보니 커다란 시골 고향집에 혼자 였다. (우각은 스스로를 수행자라고 칭한다. 일각에서는 그를 득도한 스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늦은 나이 50세가 넘어 불교에 귀의했고, 지난 10년 동안은 산사가 아닌 고향집에서 홀로 지내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밖은 아직 칠흑같고 갑자기 방안의 냉기가 몸서리 쳐진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낙엽을 몰고와 귀찮기도 하지만 낮에는 상쾌하고 반가운 친구 같았다. 깊은 새벽에 들리는 바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