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말 아르헨티나에서 3개월 남짓 살아본 적이 있다. 이 기간 앞뒤로도 5년간 여러번 아르헨티나를 방문하긴 했지만 대부분 2주 정도의 짪은 방문이어서 체류라고는 하기가 그렇다. 추운 겨울인 한국을 떠나 거의 40시간이 넘는 여정을 거쳐 도착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안겨주는 30도를 웃도는 후덥지근한 날씨는 과연 지구 반대편에 겨울이라는 게 있을까하는 착각마져 안겨주었다.
아르헨티나 하면 여러가지 단어가 떠오른다. 축구선수 마라도나, 어릴적 보았던 '엄마찾아 삼만리'란 만화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나라, 탱고, 와인, 에바페론, 포틀랜드 전쟁, 그리고 체게바라...
20세기 한 때 전세계 4대 부국 중 하나였다는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산유국이자, 세계최고의 스테이크 생산국이며 우슈아이아, 파타고니아 등 넘쳐나는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고, 드넓은 와인 생산지 및 아직도 풍부한 천연자원과 한반도의 13배에 달하는 영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하지만 동시에 대표적인 빈국이자 밥먹 듯이 모라토리옴을 선언하는 모순으로 가득찬 나라이다. 아르헨티나의 여러 곳을 돌아보며 왜 이렇게 좋은 환경을 가진 국가가 이런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부에노스아이레스 공대를 졸업한 엘리트가 택시기사 자리도 못구해서 힘들어 할까? 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독재(군사독재와 사회주의 독재가 모두 존재), 남미대륙 전체 사람들의 정신을 너무 오랜기간 지배하여 균형적 시각을 잃어버리게 한 해방신학 그리고 수입대체 정책으로 무너트린 산업정책이 작금의 중남미 대륙전체가 빈곤과 경제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원인이다. 물론 미국, 소련 그리고 유럽의 중남미 뜯어먹기도 큰 원인이었지만 그런 것은 전세계 모두에게 있었던 20세기의 이슈이므로 중남미 만의 특수한 상황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더 이상의 이런 얘기는 정치적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이런 얘기는 이 정도로 줄인다.
기본적인 시내관광도 마치고 아이를 학교에 보낸 후 나른한 여름 오후가 이어지던 어느날 책장에서 언제 산지도 기억도 안나는 '체 게바라 평전'이 눈에 들어온다. 중남미 하면 빼놓지 않고 많은 청년들의 머리 속에 한번 쯤은 등장했을 인물이 체 게바라 일 것이다.
체 게바라에 대해서는 막연히 그냥 암울했던 중남미의 독재시대를 타파하려고 했던 혁명가라는 이미지 정도만 머릿속에 있었기에 궁금증이 솟아나며 나도 모르게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유층에서 태어나서 의학을 공부하였던 체 게바라는 평범한 부유층의 생활을 살아왔다. 의사가 되기 전 오토바이를 타고 중남미 일주를 하던 중 비참한 중남미의 현실을 보게되고 그 이후 다양한 교류와 고민을 하다. 카스트로와 함께 중남미를 개혁하고자 하는 혁명전선에 뛰어들어 수많은 게릴라식 전투 후 쿠바 독립에 큰 공을 세우고 외무장관의 자리에 까지 오른다.
책에 나오는 다양한 게릴라식 전투와 역경 극복의 이야기들은 오래 전에 읽었던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과 오버랩 된다. 다소 작가의 극적(dramatic)인 시각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쿠바의 외무장관으로서 전세계를 오가고 특히 제3세계인 아프리카와의 교류에 힘썼던 체게바라는 더 이상 혁명전쟁 당시의 이상을 유지하지 않고 집권 후에 집권 세력간의 정치적 분쟁과 관료화 되어가는 카스트로 정부에 실망한 나머지 쿠바를 떠나서 콜롬비아의 반정부 혁명 게릴라 부대에서 활동하다 전사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이미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기를 떠나보낸지 30년이 넘어서 그런지 20대때 가졌던 막연한 이미지에 비해 체게바라의 행적을 보면서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과연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고 그가 꿈꾸던 혁명을 이런식으로 마무리 해야 했는지 약간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왕에 성공한 쿠바혁명이면 이를 끝까지 완성했어야 하는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책에서 나오는 체게바라란 인물의 영웅적인 모습, 독특한 경력 그리고 한 인물이 끝까지 가져가려고 했던 이상은 책을 읽는 동안에 그리고 그 이후로도 잠시동안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실제로 했는지 안했는지는 몰라도 마크로폴로가 동방견문록에 기록했다는 쿠빌라이칸이 했다는 말이 기억난다. "말 위에서 세상을 정복 할 수는 있어도 지배할 수는 없다".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있어도 세상을 운영할 수는 없다"라는 표현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십 여년 만에 책장을 정리하다 다시 '체 게바라 평전'이 눈에 들어왔다. 4차산업 혁명의 태동과 함께 과학기술에 휘둘리는 시대가 된 요즘, 이 시대의 이야기는 우리가 일부 겪었음에도 소설 속의 시대처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20세기 전반기를 휩쓸었던 사회주의는 암울했던 시대에 매력적인 대안을 제공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자본주의에는 사회주의가 섞여버렸고 소련, 중국, 심지어 쿠바같은 사회주의 국가에도 자본주의의 물결이 스며들었다. 세상은 뒤섞이면서 진화해 가고 있다. 아직도 지구상 몇몇 곳에서는 20세기 전반기와 다를바 없는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으며 어떤 나라 들은 이념이란 것이 필요없을 정도로 다양화가 진척되고 과학기술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다시 '체 게바라 평전'같은 책 속에 빠지고 싶은 이유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빨리 변화는 현실에서 과거의 기억 속으로 숨고 싶어서인지 모르겠다.
- 2021.0311 종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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