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지갑을 잃어버린 날이었다. 지하철 출구를 나서며 주머니를 더듬는 순간, 그 텅 빈 감촉. 카드 정지, 신분증 재발급, 반나절을 허비한 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저런... 그냥 액땜해서 잘됐다고 생각해."
잘됐다니. 나는 그 말에 잠시 걸렸다.
액땜이란 묘한 개념이다. 작은 불운을 큰 불운의 예방주사로 읽어내는 이 해석의 기술. 잃어버림을 잃어버림으로 끝내지 않고, 거기에 의미의 옷을 입혀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쉬게 만든다. 지갑 하나 잃고 더 큰 무언가를 면했다는 논리는, 따지고 보면 근거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래도록 이 이야기를 믿어왔다.
그것은 어쩌면 불확실성과 공존하는 법을 찾아낸 지혜일지도 모른다. 통제할 수 없는 세계 앞에서, 인간은 서사를 발명한다. 일어난 일을 '왜'가 아닌 '덕분에'로 바꿔 읽는 순간, 피해자는 비로소 해석자가 된다. 무력함이 의미로 전환되는 그 찰나.
동시에 나는 이 개념이 지닌 이중성도 생각한다. 액땜의 서사는 때로 지나친 순응을 권유하기도 한다. 억울한 손해 앞에서도 "그러니까 됐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만드는 것이다. 감사와 체념 사이, 그 경계는 생각보다 흐릿하다.
그래도 나는 그날 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가져다준 가벼움을 기억한다. 세계를 바꾸지 않았지만, 세계를 대하는 내 자세를 바꿔놓았다. 어쩌면 액땜이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방법이 아니라, 잃어버리고도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오래된 언어인지도 모른다.
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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